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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차례에 걸친 기독교 부흥운동이 비록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게 된 백성들에게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우리나라를 지배하고자 하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대규모 인원이 동원된 집회는 신경 쓰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기세를 꺾어버리고자, 경술국치가 있었던 해인 1910년 12월 27일부터 몇 건의 사건들을 계획적이고도 조직적으로 벌이게 된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경술국치)의 공포
1910년 12월 27일 안명근사건(안악사건)
1911년 1월 신민회사건(105인 사건)
바로 1910년말부터 1911년 초 까지 "OOO 사건" 이라고 불리우던 일들을 모두 묶어 "105인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발단은 망명중이던 안명근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 건설을 위해 모금활동차 황해도의 부호들을 만나러 잠입하였다가 관계자 전원이 체포되면서 시작된다.(안명근 사건)
안명근 등을 체포한 즉시 조선총독부는 다시 평안도 일대의 항일지도자와 기독교 세력을 일소시키기 위하여 '일당 60여명이 1910년 12월 27일 주모자 이승훈·안태국의 인솔 하에 압록강철교 준공식에 참석한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고 했다' 라고 허위의 사건을 조작하고는 1911년 1월 1일부터 신민회 중심 인물 600여명을 체포하였는데 이것이 신민회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의 전국 조직은 모두 와해되고, 1심에서 105명 모두 유죄 선고되었으나 항소심에서는 99명은 무죄, 나머지 6명은 유죄가 선고되어 옥고를 치루게 된다.
기독교 인사이자 반일인사로 지목된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출국, 체포를 모면하였고, 김규식은 이 사건 이후 일제의 꾸준한 회유와 협박을 피해 1913년 차량편으로 만주에 인삼장사 하러 간다는 핑계로 몽골로 망명하였으며, 윤치호는 6년간 수감되어있으면서 받았던 일본의 회유로 인해 독립운동 활동에 소극적으로 변신하였다고 합니다.
독립운동 하며 있었던 사건들이 어디 이것 뿐이었을까? 그리고 사건이 조작된 일 들 또한 저 당시 뿐 아니라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심심치않게 벌어졌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침략자로서 자행되었던 일본의 사법 폭력은 110년이나 지난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도 종종 자행되어 왔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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