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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인물

한국 초기 기독교의 부흥운동

니코데무스 2021. 2. 7. 23:13

한국의 기독교, 그리고 교회의 부흥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언제나 인용되는 "평양대부흥운동"

그 외에 원산 부흥운동과 백만명구령운동 등도 종종 언급되어지지만, 왜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는지,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것이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의 설명은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국 기독교의 초기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지나칠 수 없는 이 놀라운 사건들을 정리해 보았다.

 

[1] 시대적 배경

 

만주에 진출한 스코틀랜드 선교사였던 존 로스의 주도로 한국인에 의한 한글성경 번역 작업이 시작된 후, 신약전서의 번역 작업이 진행된 것이 1877~1886의 9년 동안이었다. 이듬해인 1887년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가 인쇄되었다. 한국인에 의해 번역된 한글성경은 천주교 보다도 앞선 것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인 1885년에 입국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비롯한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성서위원회가 조직되고 성경번역이 본격화되면서 이 운동은 일단락되게 된다. 이것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시작된 기독교 신앙이 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단순히 선진문물과 함께 들어온 선교사들에게 매혹되어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보기보다는 이 땅을 향한 일제의 마수가 점점 짙어짐으로 인해 불안해진 당시의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 선교사의 입국과 함께 기독교의 성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것 역시 사실이었다.

한편,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통해 이 땅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은 치외법권인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해 갖은 회유와 협박을 하게 된다. 외국의 선교사들 역시 일본의 마수에 주권을 빼앗긴 한국인들을 측은하게 느낌과 동시에, 자신들의 교세를 이 땅에 더 넓게 펼치기 위하여 한반도 전역을 임의로 나누기도 하고, 또 한국의 교인들을 동등하지 않게 대우하기도 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2] 대표적인 부흥운동들

 

1) 원산부흥운동

이러한 수많은 갈등이 전국적으로 발생하고 있을 1903년. 원산지역의 여선교사들 몇 명이 8월 하순부터 시작했던 성경공부와 기도회 모임은 당시 강원북부와 원산지역에서의 선교활동의 성과가 미미하여 좌절해 있었던 많은 선교사들에게 자신들의 우월감과 자만심이 앞섰음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이 모임은 이후 10월에 초교파적 모임으로 1주일 동안 열리게 됨으로써 한국인들에게 까지 집단적인 회개운동을 불러일으키기 되었다. 이후 1년여 회개운동과 전도의 열풍이 전국을 휩쓸었고 집회를 주도하던 하디 선교사가 1904년 11월에 안식년 휴가를 얻어 고국인 미국으로 귀국하면서 일단락되었다.

 

2) 평양대부흥운동

1907년 1월 초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은, 원산부흥운동을 이끌었던 하디 선교사가 1906년 돌아와 평양에서 선교사들의 연합기도회를 인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평양에서의 사경회에도 역시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교인 사이의 갈등과 반목이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는 기도들이 쏟아졌고, 당시의 분위기에 대한 기록들에도 '성령강림'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여자신도만을 위한 여자사경회도 따로 개최되었고 이렇게 변화된 여자신도들에 의해 기독교 가정으로 변화되는 예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평양대부흥운동은 하나의 새로운 선교모델이 되어 의화단사건 이후 선교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던 중국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성경 번역으로부터 시작해 30여년 밖에 안된 한국기독교에 기독교 신앙과 정신을 뿌리내리게 한 계기가 됨은 물론, 외국인 선교사와의 갈등 해소, 교인들의 도덕성 향상을 이루었으며, 성경만을 접한 후 기독교에 입교한 독특한 역사를 가진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성경공부와 기도를 동시에 열심히 함으로써 이후 복음주의적인 한국교회의 정형을 이룬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로 인한 교세의 확장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결과 또한 없을 수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당국의 감시가 강화되고 본국 정부로부터도 여러 가지 압력을 받게 됨으로 인해 집회는 한국민족의 아픔과 분노를 성령운동이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희석시켰다는 평가와 함께 적지 않은 지도자급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하는 현상을 감내하게 되었다고 한다.

 

3) 백만명구령운동

1907년 평양에서 치솟았던 대부흥운동의 열기가 해를 넘기면서 급속히 식어가자 몇몇 선교사들이 그 열기를 다시 살려보고자 1909년 개성에서 1주일간 산상기도회를 가진 후 지방전도여행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9월 서울에서 개최된 남감리회 선교연회의 표어를 "백만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라고 정하게 되었다.

당시 전국 교인 총수가 14만~20만명 정도라 추산되기에 불가능해 보였던 이 목표는 1910년의 경술국치를 앞두고 암울한 정치상황에서 교회로 올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들을 생각하여 정해졌다고 한다.

이때 전도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날연보(day-offering)이라 하여 물질적 연보와는 별개로 자신의 시간을 하나님께 헌일(獻日) 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사회, 경제적 상황으로 보건대 시간과 노력 이외에는 드릴 것이 별로 없는 교인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받았으며, 전국적으로 10만일의 날연보가 바쳐졌다고 한다. 또한 대규모의 문서전도가 이루어진 것도 이때부터라고 한다.

평양대부흥운동과는 달리 백만명구령운동은 본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자긍심과 공동체 의식을 강하게 할 수 있었으며, 각 교파 간의 연합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한편, 일제의 침략이 가시화되는 불안했던 당시 국내 정세로부터 신앙으로의 도피처를 만들어주어 현실을 외면하고 방관한 점도 있었다.

 

[3] 부흥운동 그 이후

전국적인 전도운동으로 인해 불안을 느끼게 된 일본은, 그 기세를 꺾고자 이듬해 1910년 12월 말부터 105인 사건을 벌임으로써 평안도 일대의 항일지도자와 기독교 세력을 일소시키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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