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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1483~1546) : 독일의 종교개혁가, 개신교 교회의 아버지
#로마서 :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성서.
#존 웨슬리(1703~1791) :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 창시자.
개신교에서 신앙 생활을 하며 성경공부 좀 해봤다 하는 수준이 되면 만나게 되는 키워드 입니다.
'로마서'는 시대적으로 본다면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AD 56~57) 중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직전인 3개월 동안 고린도(고대 코린토스)의 가이오의 집에 머물 때, 로마 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낼 메세지를 데르디오가 대필하여 작성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마르틴 루터'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부정부패가 만연하던 당시에, 성 베드로성당 개축비용 마련을 위한 면죄부의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이라 비판하며 믿음을 통해 의롭함을 얻는 '이신칭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어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의 정문에 붙인 사건이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었고 후일 '개신교'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주석'은 1515년 부터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로마서 강의에 사용한 원고를 정리한 것인데, 어쩐 이유에서인지 원고의 '서문'은 그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을 마쳤던 1522년에 작성되었다고 합니다.
'존 웨슬리'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글에는 언제나 '회심'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습니다. 회심(回心). 원래의 뜻은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겠지만, 특히나 개신교에서는 '한 인간이 자신의 죄로부터 돌아서서 믿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기로 결단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회개'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세상에 물들어 살던 평범한 사람이 '회심'을 하게 되는 것도 은혜스러운 일이지만, 존 웨슬리는 목회자로 선교사로 많은 활동을 하던 인물이어서 그런지 그의 '회심'은 "18세기를 넘어 19세기의 성결 운동과 구세군 활동 및 20세기 오순절 운동, 기독교 사회복지 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발췌:위키백과)고 합니다. '존 웨슬리의 회심 사건'에 대한 신학적 의의는 전문적인 영역이므로 이 글에서는 그 '회심 사건'과 관련된 여러가지 주변 이야기들만 다루고자 합니다.
매년 5월 24일은 올더스게이트의 날(Aldersgate Day) 혹은 웨슬리의 날(Wesley Day)라 불립니다.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던 영국 국교회 사제 존 웨슬리가 '중생(거듭남)의 확신'을 경험한 사건을 기억하며 전 세계의 감리교 기독교인들이 기념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존 웨슬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을까요?
존 웨슬리(1703~1791)는 영국 국교회 사제였던 아버지와, 청교도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후 20대 중반(1728)에 국교회 사제가 되었고, 그 후 자신의 아버지의 교구에서 1년간 사제로 사역도 하였습니다. 이후 다시 옥스포드 대학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한편 동생인 찰스 웨슬리와 함께 신성회(Holy Clup)라는 모임을 조직하여 매일 성경 공부와 경건 생활을 함께하면서 감옥을 규칙적으로 방문하여 죄수들을 전도하는 사회선교를 하였습니다. 이 모임이 지나칠 정도로 규칙적이면서도 매우 열정적으로 경건 생활에 매달렸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많은 질시와 조소를 당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지어지 별명이 바로 메소디스트(methodist, 규칙쟁이?)로 후일 '감리회'의 명칭이 되었으며 이 활동 역시 회심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감리교회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1735년, 웨슬리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 중 하나였던 아메리카 조지아에서 선교하기 위해 10월 14일 시몬즈(Simmonds)호를 탔는데 이때 독일 노동공동체에서 온 모라비아인 개신교도 26명도 함께 있었습니다. 장장 4개월 23일간 계속된 항해 속에서 배가 전복될 뻔 한 위험한 상황이 몇 번 있었고 웨슬리를 포함한 영국인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 떨고 있었지만 모라비아 교도들은 시편을 찬송하고 기도하는 등 침착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웨슬리는 이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특히 스팡겐베르크라는 모라비아 교도의 지도자와의 대화 도중,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후 조지아 에서의 활동은 기대와는 달리 여러가지 마찰과 갈등만 남긴 채, 1년 9개월만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1738년 2월 1일) 선교사 임명장까지 반납하고 실의에 빠져있던 그는 이번에도 독일에서 온 모라비아 목사인 페터 뵐러를 통해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했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믿음을 얻을 때까지 믿음에 대하여 설교하시오. 그리고 그 믿음을 얻게 되면 그 얻은 믿음을 가지고 설교하시오." 라는 권면에 위로를 받고 다음날인 1738년 3월 6일 부터 믿음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던 중, 5월 24일,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의 모라비아 교도 모임에 참석한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게 됩니다. 당시의 상황을 웨슬리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이루시는 변화를 서술하는 단락에서,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strangely warmed) 것을 느꼈다. 내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분께서 진정 나의 죄를, 나의 죄까지도 가져가셨다는 사실과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게 주어졌다."
'회심 사건' 이후, 웨슬리는 국교회로 부터 직무파면을 당하여 더 이상 국교회 사제로서 목회할 수 없게 되자,조지 휫필드와 함께 야외 설교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후 여러 곳을 다니며 설교를 하면서 가는 곳 마다 부흥이 일어나면 곧바로 신도회를 조직하였던 일들이 후일 '감리교회'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타 교단의 역사이므로 이 정도로 줄입니다.)
'회심 사건'과 연관된 흥미로운 내용이 세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웨슬리의 신앙이 각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인 '모라비아'라는 지역이고, 또 하나는 웨슬리가 회심을 하게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 이며, 마지막으로는 회심의 장소 '올더스게이트' 거리 입니다.
모라비아(Moravia)
모라비아(혹은 모라바 Morava)라는 명칭은 오늘날 체코의 동쪽(연한 파란색)에 위치해 있는 역사적 지역입니다. (지도 발췌 : 위키백과)
모라비아 출신 유명인을 찾아보니 만만치 않습니다. 밀란 쿤데라, 쿠르트 괴델, .. 지그문트 프로이트...
모라비아 혹은 체코 하면 항상 언급되는 지명이 있으니 바로 '보헤미아'입니다.15세기경 프랑스인은 집시를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집시(gypsy)라면 유럽 각지에 거주하는 인도아리아계 유랑민족을 일컫던 용어인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방랑자, 자유분방한 예술가나 지식인들에 대한 명칭이 되기도 하였는데, 락밴드 Queen의 '보헤미안 랩소디' 처럼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 보헤미아나 집시 등의 명칭은 당사자들은 좋아하지 않는, 때로는 멸칭으로도 쓰인다고 하니 주의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모라비아의 동쪽으로는 현재의 '슬로바키아'가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북쪽으로는 폴란드와 접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모두 '한가닥' 하던 국가들인데, 모라비아 역시 10세기 경에는 슬라브족 최초의 거대국가인 '모라비아 왕국' (833~907, 지도의 연한 초록색)을 세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세워진 나라의 이름을 대모라비아(Great Moravia)라 부른다고 합니다. 이후, 내분과 이웃한 국가들의 견제에 시달리다 907년 헝가리 마자르족의 침입을 받고 멸망하게 되면서 보헤미아 지역(보헤미아+모라비아)과 슬로바키아 지역으로 나뉘게 됩니다.(1918년까지)
대모라비아가 건국되던 당시(833) 이미 주변 지역으로 부터 선교사들이 유입되었고, 863년 동로마 제국의 선교사 형제인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에 의해 본격적으로 기독교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웃의 보헤미아도 867년, 통치자가 세례를 받는 등 개종을 하게 됩니다.
한편, 존 웨슬리에게 영향을 주었던 모라비아 교도들은 '모라비아 형제회'라 불리던 복음주의자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헤미아 지역에 살던 모라비아인들이 1722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개신교 탄압을 피해 독일의 드레스덴의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로 이주하였는데, 3년 뒤에는 그 수가 1백명이 넘었으며 진젠도르프 백작 자신도 모라비아인들과 함께 기도회를 가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청 제국, 페르시아, 북극 등에서 활발한 해외선교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신앙의 모태는 다름아닌 마르틴 루터보다 백년을 앞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얀 후스 였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에도 파문은 기본이고 여러가지 압박을 피해 도피생활을 해야할 정도였는데, 그보다 백년을 앞선 시기였으니 반발이 더 심헸았겠죠? 이단 정죄를 받고 투옥되어 고문을 받다가 결국 공개적인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처형장에서 얀 후스의 마지막 외침은 이러했다고 합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진정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그렇다면 나라고 주님을 위해 이 덜 고통스러운 면류관을 다시 쓰지 말란 법 있는가? 이 따위가 뭐 그리 창피하단 말인가? 누가 뭐래도 난 그럴 것이니, 그것도 기꺼이 그럴 것이다”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
종교개혁이 있었던 1517년의 2년 전,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과 교수로서 '로마서 강의'를 시작합니다. 그 때의 원고는 루터 사망 후 상속인들에 의해 보존 되었지만 그 행방이 묘연한 채 400여년의 시간이 지난 1905년에야 발견 되었고, 영어판 '로마서 주석'은 1961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발표가 되었다고 합니다. (기회가 되면 별도의 소개 글로 소개하겠습니다.)
그런데 강의 원고와는 별도로 '로마서 주석'의 '서문'은 1522년 9월에 작성 되었습니다. 이는 루터가 당시 서민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하던 쉬운 독일어 표현으로 신약 성경(흔히 루터의 9월성경이라 불리우는) 의 번역을 마쳤던 시기였습니다. 그가 '로마서'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였는지는 서문에 기록된 다음의 문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 외워야 할 뿐만 아니라, 영혼의 매일 양식처럼 그것을 날마다 다루어야 한다!”
(루터의 9월 성경의 모습.이전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있어 일반인이 읽을 수 없었으나 쉬운 독일어로 쓰였을 뿐 아니라 삽화가 첨부된데다 가격 또한 파격적으로 저렴하였다고 합니다.)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의 분량은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웨슬리가 감동을 받았다고 알려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이루시는 변화를 서술하는 단락"은 어떤 내용일까요?
현재 국내에도 몇 편의 도서가 번역&출간되었는데 그 중 한권을 기준으로 '서문'의 분량을 보면 약 18페이지 분량이 됩니다. 웨슬리가 참석했던 모라비아 교도 모임에서 누군가 '서문'을 어떻게 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전문을 읽었다고 가정하고 번역된 서문을 읽어보니 빠르면 약 한시간 정도 되더군요. 속도를 늦추면 최대 2시간도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설교자 없이 참석자들이 한마음으로 '서문'의 내용을 함께 듣는 자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웨슬리의 마음에 '회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이루시는 변화를 서술하는 단락"은 어디쯤일까요? 이에 대한 기록 역시 남아있지 않은 듯 보입니다만, 믿음이라는 용어를 설명해주는 부분(P.20)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이니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 요한복음 1장[:13].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과 생각과 우리의 모든 힘에 있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이 동반된다. 오, 믿음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얼마나 생생하고 창조적이고 적극적이고 강력한 것인지. 믿음은 내내 좋은 것 외에 다른 것을 행할 수가 없다. 믿음은 결코 행해야 할 선행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질문이 던져지기 전에 선행을 이미 행하고 계속해서 선행을 행하고 있다. ..."
올더스게이트 거리
웨슬리가 1738년 당시 참석했었던 모임의 위치는 영국의 수도 런던의 모라비안 교회(올더스게이트 거리 28번지 부근)라고 합니다.
"앨더스게이트는 영국 런던시의 한 구로, 한때 런던시를 둘러싸고 있던 런던 성벽의 북쪽 성문 중 하나에서 이름을 따온 곳입니다.
런던의 성벽은 로마제국 시대인 AD200년 경에 지어졌는데, 올더스게이트(성문)는 처음 성벽이 만들어질때 세워진 것은 아니고 나중에 추가되었습니다." (발췌 : 위키백과)
(런던 로마 성벽 - 타워 힐 정원에 남아있는)
(성문의 오래된 그림, 1650년 경)
(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2년 당시의 올더스게이트의 풍경 그림)
성문 하면 항상 왕래하는 사람으로 북적이는 풍경이 연상되듯, 1738년 당시에도 외국인인 모라비아인들까지 자주 볼 수 있는 번화한 지역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올더스게이트 28번지 부근의 풍경)
사진의 오른쪽 건물 위치에 모라비안 교회가 위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런던 시티 장로교회'가 위치합니다. 한편 웨슬리가 회심을 하였다는 위치에 대해서도 영국쪽과 미국쪽의 주장이 서로 다르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회심을 기념하는 기념물도 각각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감리교회 측이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곳은 런던 이슬링턴 자치구 남쪽의 세인트 루크 지역에 위치한 웨슬리 예배당(Wesley's Chapel)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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